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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경린 - 풀밭 위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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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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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낙심한 사람은 매일,매 시간 가파르게 늙는다.
주름이 생기거나 흰 머리카락이 올라와서가 아니다.
얼굴의 윤곽이 느슨하게 벌어지며 눈과 눈 사이가,뺨과 뺨 사이가,귀와 귀 사이가 점점 더 넓어진다.
보이지 않는 이음새가 헐거워져 하루가 다르게 넓적한 얼굴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단 하나의 표정,그것은
무뚝뚝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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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유한 리듬...그 리듬이 어떻게 생겨나게 될 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자신에게 맞추어 살기로 하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꼭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정해져 있는 법이 있는가.
천성이란 게 있다면,천성대로 게으르고 천성대로 외롭고,
천성대로 불행하고 천성대로 가난하고 천성대로 만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천성대로 고독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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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생은 단순한 것인데,책이나 영화 같은 것들 때문에 공연히 복잡해지기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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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이게 무엇일까,묻지 않을 것이다.묻기 시작하면 더욱 모호해진다.
크리스마스이다.나는 혼자 있다.
그는 오늘도,가능한 것을 하는 것과 불가능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내게 가르친다.
우리 사이에 가능한 것을 적어본다.
너무 빈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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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나요?눈을 감으면,당신 눈 속의 눈동자가 내 눈 속에 고인 물처럼 흔들려요.
당신의 속눈썹이 내 속눈썹을 덮어요.
여린 속눈썹 아래서 이슬처럼 떨리는 이 집요한 시선...
내가 당신을 보고 있는지 당신이 나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이토록 보고 있다 해도 여전히 보고 싶어요.
어쩌다가,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만들었는지.
우리가 원한 건 단지 보고 싶어하는 마음인 걸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 당신 눈이 말하네요.
그러면 나는 이 마음을 생의 끝까지 지니고 가야 하는 건가요?그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 마음을 부수어버리고 싶어요.
내 눈 속에 가만히 닫아 익사시키고 싶어요.화장시켜 멀리 날려버리고 싶어요.
그렇게 나를 해쳐서 헝겊인형 같은 무생물의 마음이 되어 당신이 죽을 때,
단 한번 열리는 그 구멍 속으로 순장처럼 함께 사라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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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는 게 좋은가요?"
"좋아."
"그런데 왜 전화 안 하세요?"
"참는 거다."
"왜요?"
"그것도 좋아.너를 참고 있는 마음이 맑고 낮아서 소중해."
나는 힘들어요.그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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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 눈 속의 사랑을 보고 당황하죠.
그것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고 싶어했어요.정체불명의 사랑이 내 눈 속에 낙화처럼 떠돈다 해도,
나의 웃음이 도처에서 사랑처럼 보였다 해도,실은 그 누구를 향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보다는,정말 그보다는,들에서 핀 꽃나무가 누구를 향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밝히며 활짝 피어나듯,
내 사랑도 그런 것이면 좋겠어요.

 

 

출처 : 베티 / 우주연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