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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ㆍ영상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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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이란 밤새 벽을 쌓는 일이다
감금, 꺼지지 않는 가로등처럼 뜬 눈으로 견디는
밤과 새벽 사이의 생매장
길 잃은 바람이 어제의 그 바람이 같은 자리를 배회하고
고양이 울음은 있는 힘을 다해 어둠을 찢는다
이 터널은 출구가 없다
어떤 기다림은 질병이다
간절한 소식은 끝내 오지 않거나 이미 왔다 가버리는 것
그러니 너는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서야 겨우 잠이 든다
어떤 묘혈은 땅 속을 흘러 다닌다는데
머리맡에 꽃향기가 묻어 있다
첫 매화가 피었다고 한다


꽃의 탄생 / 윤의섭

 

 

 

 

 

 


옷의 식욕은
왕성하다, 성욕보다 수면욕보다 힘이 세다

나는 옷의 배를 불리는 양식이다

양말을 신자, 발이
사라진다, 양말이, 발을 먹었다

왼쪽 다리를 먹은 바지가
오른쪽 다리를 밀어 넣으니 오른쪽 다리마저
먹어버린다

왼팔을 넣으면 왼팔을, 오른팔을 넣으면
오른팔을 먹는 재킷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재킷

나는 이제 어깨도 가슴도 없다
나는 이제 한 벌의 옷이다!

거리에 사람을 갖춰 입은
옷들이 둥둥 걸어 다닌다
숫제 개나 고양이를 갖춰 입은 옷도 있다

아침부터 왕성하게 나를 먹어치운 옷은
저녁이면
나를
생산한다

살아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끊임없이
소비 된다


문명의 식욕 / 배한봉

 

 

 

 

 

 


천둥 번개로
목욕한 몸을 말린다
나무 곁에서 똬리를 틀고
뜨거운 표정을 짓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나가는
너는 영겁의 세월 전
나를 기르던 나의 치정
비린 육신
페로몬을 뿜고 혓바닥을 낼름거리지만
너는 젖은 흙을 밟으며
무심하게 스쳐간다
청포 냄새가 난다
치정을 말리기 좋은 유월
너에게 우아하게 다가간다
스스스
근질거리는 입술들
네가 뒤돌아보는 순간,
뒤엉킨
태양의 혀


태양의 혀 / 박미산

 

 

 

 

 

 


데인 자리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를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기 전 가끔은 돌이켜 아픈 자국 하나 남기고 가는 저 뜨거움 물집은 몸에 가둔 시간임을 안다

마당귀에 산수유꽃이 피는 철도 독감이 잦아 옆구리에 화덕을 끼고 자다 나는 停年이 되어 버렸다

노비의 뜰에나 심었을 산수유나무
면도날을 씹는 봄햇살에 걸려 잔 물집 노랗게 잡힐 적은 일없이 마루턱에 앉아 동통을 앓고 文書처럼 서러운 기억이 많다

한 뜨거움의 대를 유배시키기 위해 몸을 키우는 물집 그 수맥을 짚고 산수유가 익는다고 비천하여 나는 어깨의 경사로 비탈을 만들고 물 흐르는 소리를 기다리다 늙는 것이다

시간의 문장은 흉터이다 둑 위에서 묵은 편지를 태웠던 날은 귀에 걸려 찢어진 고무신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 날아간 연기가 남은 재보다 무거웠던가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했으며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

 


산수유 꽃 /신용목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도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객석에 앉은 여자 / 김승희

 

 

 

 

 

 


1

    이를테면 빙하는 제 속에 바람을 얼리고 수세기를 도도
  히 흐른다
    극점에 도달한 등반가들이 설산의 눈을 주워 먹으며 할
  말을 한다 몇백 년 동안 녹지 않았던 눈들을 우리는 지금
  먹고 있는 거야 얼음의 세계에 갇힌 수세기 전 바람을 먹
  는 것이지 이 바람에 도달하려고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거룩한 인생에 지각을 하기 위해 산을 떠돌았어 그리고
  이따금 거기서 메아리를 날렸지

   삶이
        닿지 않는 곳에만
                         가서
                              메아리는
                                       젖는다

    메아리는 바람 앞에서 인간이 하는, 유일한 인간의 방
  식이 아니랄까
    어느 날 거울을 깨자 속에 있던 바람이 푸른 하늘을 향
  해 만발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우선 노래부
터 시작하자고.

2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
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

바람이 불자
            새들이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간다

  인간의 눈동자를 가진 새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바로 오
는 타인의 눈 속을 헤맨다
  그것은 바람의 연대기 앞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는 농담 정도

 

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 김경주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 밖에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가슴에 안아야 했나요
'

천장엔 옷가지가 우거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속의 새들이 쪼아 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고 싶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의 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 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 내밀었다
짧아지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기에 맞춰 몸을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 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에서 잠드는 우리는
제 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 속에 담아온다

 

기울어진 아이 /최정진

 

 

 

 

 

 


아이가 도회지에 처음 그린 얼굴
입이 없어 완벽하다
평생 살아내야 새길 수 있는 주름살같은 선(線)은
다빈치도 그려낼 수 없는 입술을 감춰놓고 있다
아이 같은 마음에게만 그려지는 숨겨진 입술이 비칠 때
선은 주름의 본성을 드러내고 숨쉬기 시작한다
막, 선의 눈이 깜박여 체온을 부풀리고 있다
본디 도화지같이 평면이었던 내 얼굴도
누군가의 안에서 그려지는대로 자리잡아 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연필이 무뎌진 흔적일까, 내 광대뼈는
한 사람의 사랑 고백을 부추겼던, 뺨의 홍조는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지우개가 문지른 핏빛일까
내 소리를 주리틀어 말(言)되게 했던 정신과
이곳까지 걷게 한 소멸로 짙어지는 것들 , 모두
얼굴에서 주름살로 되살아난다
주름은 아래쪽으로 처져 있다
입 하나 달아맨채 선(禪)에 들어 있다
나는 그 앞에 아무 것도 묻지 않기로 한다
아이가 숨겨둔 미소 하나 들려나올 뿐이다

 

얼굴 / 차주일

 

 

 

 

 


내 가슴에
너 마큼의 구멍 뚫린 적 있었다
뚫린 구멍은
나를 빠져나가 넝마처럼
골목을 배회하며
다녔단다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 불면 목적 없이
어딘가에 떨어져
그대로 꽃이 되기도 하였지만
거드름 피우는 지폐 세상에선
홀대보다 더 한 잊혀짐으로
아무 곳에나
처박혀 있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너도 먼 옛날 가슴
뚫린 채로 양반과 천민까지
호령하며 살았던 적 있었더구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하였지
사람 손때가 그리워
콧구멍에 너를 집어넣고 빼내는 일을
심심풀이 삼아 반복한 일도 있었고
이건 우연이지만
내 아이가 너를 삼키고
두려워 할 때
나는 똥 속에서 나온 너를 보고서야
아이에게 똥의 섭리 같은 너를 견줘 들려주었다

사람의 일도 이럴 진데
세상 참 우습구나
지폐처럼 구겨진 사람들이
너를 보시한다고
연 방죽에 묵직한 네 꿈을 던져 놓고 가더라

그래도 견딘 것이 너의 둥근 마음 아니냐

 


동전, 너도 고단하겠구나 / 김다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宵)야 능소(凌宵)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
이야 아니되어도 능소야 능소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 째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능소화 / 김선우

 

 

 

 

 

 


1

이제 그만 엎질러버리고 싶어요 휘저어버리고 싶어요
좀처럼 헹굴 수도 없는 목마름,얼룩처럼 앞치마에 찍혀 있어요
뜨거운 목숨도 아닌데 어쩔 수 없는 꿈도 아닌데
꿈속에서 내가 잠시 기울었다 일어서는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무시로 송곳처럼 쿡쿡 찌르는 아픔 알 것 같아요
비어 있는 가슴을 더욱 더 긁어대던 더부살이 같은 물살을 알 것 같아요
견고한 언어 의 씨앗 다투어 잎 아무는 기척 알 것 같아요
목마른 얼룩 앞치마에 파고드는 저녁나절의 쓸쓸함도 알 것 같아요
내 삶의 그림자였던 보랏빛 실핏줄에 닿던 칼금 지금도 징그럽게 꿈틀거려요
그리움이란 변증법 데리고 꿈틀거려요
나를 떠난 그대는 이미 멀리 있는데
그 무관심도 관심인 듯 짓궂게도 출렁거리는 나 바람이에요

2

비트 아래 엎드린 아이들은 황사바람을 털고 있어요
어딘가에 있을 풀밭을 기웃대며 지나간 시절을 꿈꾸어요
먼 풀밭 너머 장다리꽃 사이로 아직 알을 까지 못한 벌레들은
썩은 밀랍 을 게워낸대요 벌레들이 잠든 밀랍의 무덤을 지나 무개차가 지나가지요
풀잎 같은 허리 꺾으며 툭툭 마디 끊어지는 소리 들려요
쇠비름처럼 붉은 길의 줄기를 타고 장다리꽃이 오고 있어요
종알대는 꽃잎이 흔들거려요
무수한 발자국이 파놓은 길바닥을 지나 바람은 가고
장다리꽃 속으로 아이 두엇 종알거리는 소리 들려요
아직도 오지 않는 풀밭을 기웃대는 나를 종알거려요

 

찾잔 앞에서/이선희